[올라! 이은화 작가 시 읽기⑩] 접힌 곳은 자꾸 접혀 아프고

이은화 작가 / 기사승인 : 2025-03-10 15:5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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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힌 곳은 자꾸 접혀 아프고
시인 조효복

접힌 곳은 자꾸 접혀 아프고

조효복



누가 시킨 일도 아닌데 나 아니면 안 될 것 같아요
이런 중독 번번이 우울해집니다
모른 척하는 일은 어려워요
좋은 사람이 되는 것처럼 멀고요

중략

사방은 투덜대기 좋은 벽이지요
돌아앉은 사람들은 먼저 손을 내밀지 않아요
토라진 말들을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펜 소리가 사각사각 나를 토닥입니다
다음 그다음 페이지는 조금 나아질까요
접힌 곳은 자꾸 접혀 아프답니다

새 노트를 삽니다
예쁘게 반듯하게 처음이 되어
모두가 좋으면 좋겠습니다


 

▲ 이은화 작가
[일요주간 = 이은화 작가] (시 평론) 녹두꽃이 갓 필 것 같은 겨자색 표지에 ‘사슴 접기’라고 쓰인 시집을 받고 첫 장을 읽었을 뿐이다. 그런데 나는 어느새 마지막 해설을 읽고 있었다. 겨울 햇볕 내린 창가에 족히 한두 시간은 앉아 있었던 것 같다. 도깨비에 홀린다는 것이 이런 느낌일까. 조효복 시인의 『사슴 접기』를 읽으며 내가 지워지는 체험을 하다니. 장자의 호접몽에 취한 기분이었다. 『사슴 접기』는 제목부터 내게 ‘끌림’으로 다가왔다. 작가는 제목을 정하는 일에 마지막까지 고민한다는 말이 있다. 나 역시 제목을 정하는 일에 아이의 이름을 짓듯 정성을 다했던 것 같다. 백년이 지나도 늙지 않는 제목, 책의 내용을 들키지 않을 제목, 작가의 세계관을 잘 보여주는 제목 등.


‘누가 시킨 일도 아닌데 나 아니면 안 될 것 같아요/ 이런 중독 번번이 우울해집니다/ 모른 척하는 일은 어려워요/ 좋은 사람이 되는 것처럼 멀고요’ 누구나 이런 경험 가지고 있을 것이다. 스스로 오지랖이라고 자책하면서도 비슷한 상황이 되면 내가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마음. ‘사방은 투덜대기 좋은 벽이지요/ 돌아앉은 사람들은 먼저 손을 내밀지 않아요/ 토라진 말들을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펜 소리가 사각사각 나를 토닥입니다/ 다음 그다음 페이지는 조금 나아질까요/ 접힌 곳은 자꾸 접혀 아프답니다’ 반복되는 행위의 아픔은 독자가 조효복 시인의 글을 읽는 것이 아니라, 시인의 글들이 독자의 마음을 읽어낸다는 표현이 더 가까울 성싶다. 이처럼 독자들의 일상적 경험을 대변하는 『사슴 접기』는 겨자색 표지에 독자가 자신의 이름을 새겨도 무방할 만큼 우리의 경험을 옮긴 듯 친밀한 정서를 보인다.

‘접다’의 사전적 의미를 ‘아프다’로 갈음하는 시인. 이 감정의 뒤척임은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마력을 갖는다. 겹겹이 접힌 종이 모서리를 펴보면 사슴은 어떤 모습일까, 궁금해지는 시편들을 나는 더 이상 펴지 않을 것이다. 양념을 넣어둔 어머니의 보물창고처럼 『사슴 접기』 안에서 여러분이 직접 시고 달고 짠 맛들을 경험적이고 개성적인 사유를 통해 만나길 바란다.


‘혼자라는 말을 접으면 둘이 되고 넷이 되고 점점 단단해’진다는 화자가 ‘쉽게 흔들리는 결심들’을 딛고 ‘나는 나를 켠다’고 전하는 (「사슴 접기」). 조효복 시인의 『사슴 접기』는 매 순간 숱한 결심을 놓지 않은 자기 증명에 대한 선물이자 곧 독자인 우리의 선물이 되지 않을까. 각 시편의 경험적 연쇄를 읽는 동안 우리도 자신만의 한 권의 책을 완성하는 시간에 들 수 있기 때문이다.

 

※ 이은화 서울예술대학 졸업. 시집 『타인과 마리오네트 사이』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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