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라! 이은화 작가 시 읽기㉛] 복희

이은화 작가 / 기사승인 : 2025-05-22 17:0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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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희

남길순


복희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차가운 바닥에 앉아
주인을 기다리고 있던 개가 일어선다

개가 걷고
소녀가 따라 걷는다

호수 건너에서 오는 물이랑이 한겹씩 결로 다가와
기슭에 닿고 있다

호숫가를 한바퀴 도는 동안
내 걸음이 빠른 건지 그들과 만나는 거리가 조금씩 좁혀졌는데

인기척을 느낀 소녀가 먼저 지나가라고 멈춰 서서
개를 가만히 쓸어주고 있다

희미한 달이 떠 있다

모두 눈이 멀지 않고서는 이렇게 차분할 수 없다


▲ 이은화 작가

[일요주간 = 이은화 작가] ( 시 평론 ) ‘복희야’ 친근한 이름입니다. 고요가 낮게 깔린 호숫가를 걷는 소녀와 복희의 모습이 그려지는 시, 복희를 부르는 청각적 심상 말고는 소녀와 개와 화자의 움직임에는 소리가 없습니다. 마치 영화 속 ‘복희야,’ 한마디가 서사의 유일한 대사처럼 정적을 깨지요. 이 시의 고요는 앞을 보는 사람과 보지 못하는 사람의 마음과 귀를 열어줍니다. 마치 ‘인기척을 느낀 소녀가 먼저 지나가라고 멈춰 서서/ 개를 가만히 쓸어주고 있’는 듯 곁에 머무는 이미지가 그려지지요.

「복희」는 작가와 많이 닮아있습니다. 『한밤의 트램펄린』 속에는 화자의 내적 정서가 잘 담겨있지요. 시 편들을 읽는 동안 시인 마음의 몽타주가 그려질 만큼 시적 개연성이 돋보입니다. 먼저 국면을 제시한 뒤 다른 정황으로 옮겨가는 힘 또한 네트에 공을 넘기듯 매끄럽고 빠릅니다. 소녀의 동반자인 복희, 우리에게도 복희처럼 묵묵히 길을 안내하는 귀인貴人이 있을까요.  


어느 장애인 복지관에는 지적장애 2급인 한 중년이 있어요. 사회성은 초등 1학년 정도인 중년과 나이는 중학교 1학년 정도 되어 보이지만 정신 연령은 가늠되지 않는 한 소녀가 있지요. 중년과 소녀는 친구랍니다. 복지관 카페에서 차를 마시며 중년의 이름을 부를 때였어요. “나도 이름 있는데…” 소녀가 내게 불쑥 말을 걸어와 이름이 뭐냐고 물었지요. 그런데 갑자기 당황한 이 친구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아! 이름을 잊어 버렸다. 우리 아빠가 이름 잊어먹지 말라고 했는데. 혼나겠다.” 민망한 듯 얼굴이 빨개지던. 이 모습 어찌나 예쁘고 귀엽고 아프든지 한 편의 시 읽는 것 같았습니다.

소녀가 수시로 자기 이름을 잊는 것처럼 두 사람은 친구라는 것을 잊을 때도 있어요. 어느 날은 서로 모르는 척하거나, 한쪽에서만 아는 척을 하거나, 서로가 반가워하거나. 매주 수요일 복지관에 나가는 중년 친구는 만나는 사람들에게 자기 이름을 알려주는 걸 좋아해요. 그러나 주위 사람들의 이름과 사물의 이름은 중년 친구의 기억에서 자주 멀어져요. 치매가 시작된 친구는 이름과 웃음을 잃을 때가 있어요. 우리에게 자기 존재감을 일깨우는 이름을요.

‘물이랑이 한겹씩 결로 다가와 기슭에 닿고 있다’라는 행은 다가오고 멀어지기의 반복이지요. 이처럼 우리와 연을 맺은 이름들은 일상에서 자주 불리며 멀어지기를 반복합니다. 복희와 소녀가 걷는 호숫가는 이들에게 익숙한 공간입니다. 익숙한 반복이 리듬을 낳는 호숫가, 이들의 규칙적인 보폭에서 운율이 느껴지는. 시 속의 소녀와 복희, 그리고 복지관의 소녀와 중년이 그리워지는 시간입니다.

 

※ 이은화 서울예술대학 졸업. 시집 『타인과 마리오네트 사이』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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